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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ter Days

 

 

영국의 화가 L.S. 로리(Laurence Stephen Lowry)가 야간 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시절, 그의 부모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그의 가족은 맨체스터 교외 지역에서 도시 외곽의 산업 지역으로 이사했다. 처음에 로리는 불길한 느낌을 주는 공장들, 높게 솟은 굴뚝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가 자아내는 음산한 지역 분위기를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동네에 익숙해진 그는 지역 풍경을 소재 삼아 강박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외곽 산업 지대는 ‘성냥개비 남자’들이 등장하는 도시 풍경으로 명성을 얻은 로리의 핵심 소재가 되기에 이른다.

 

로리의 심경 변화는 마치 계시를 받은 것처럼 한순간에 이루어졌지만, 그는 이를 특정 사건과 연결 짓지는 않았다. 오히려 홀연 찾아온 깨달음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늘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환경을 마치 처음 본 풍경처럼 신선하게 느끼게 된 것이었다. 어느 날, 그는 지난 7년 동안 최선을 다해 무시하던 펜들베리 마을의 기차역에서 기차를 놓친다. "역을 나서는 내 눈에 아크메 방적 회사 공장이 보였습니다”라고 후일 로리는 회상했다. 축축하고 을씨년스러운 오후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선 거대한 검정 구조물에는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들이 줄지어 있었다. 공장은 한창 가동 중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수도 없이 봐왔지만 제대로 보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홀린 듯 바라보며 매혹되어 버렸습니다."

 

그를 가리켜 ‘세계 최초의 산업 도시에서 살았던 최후의 인상주의 화가’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1976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공장 건축 양식과 노동자 계층의 도시 내 삶을 예술적 소재로 승격한 데 대한 찬사가 줄을 이었다. L.S. 로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고작 일곱 살에 불과했었다. 그의 그림은 어린 나한테 영향을 끼친 첫 예술 작품이었다. 지금 김승구의 사진을 바라보는 내게는 로리의 그림이 떠오른다. 마치 조감도와도 같은 시선, 누가 누구인지를 구별할 수 없는 사람들이 군집해 살아가는 모습. 그의 사진 속에서 사람들은 거대한 환경 속에서 군집을 이루고 있는 모습으로만 식별된다.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내 눈에는 김승구 작가가 촬영한 장면들이 기이하면서도 비범하게 느껴졌다. 서울 도심 광화문 광장을 장악한 거대한 분홍색 곰(구글 검색을 해보니 '벨리곰'이라는 이름이 있었다)의 존재를 모른 채 무심한 표정으로 축제에 참여 중인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사진에서는 카메라가 나무에 거는 장식물 같은 모양으로 조경된 허름한 운전 학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평창 송어 축제를 촬영한 사진에서는 얼어붙은 강 위로 정갈하게 늘어선 텐트들에서 수학적 질서를 본다. 그의 거의 모든 사진에서 인간은 섬뜩할 정도의 균질한 조화를 이루며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혹시 정교한 포토샵 장난에 속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일사불란하게 환경 속에 녹아드는 모습이 독특하게 느껴졌다.

 

한국인들도 김승구 작가의 사진을 볼 때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이 뒤섞인 느낌을 받을지 궁금하다. 한국에서는 이런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인지? 흔하디흔할 뿐인 장면에 단지 작가가 서사성을 부각시켜서 한국인의 눈에도 새롭게 보이는 것일까? 사진 속에서 보이는 소재들은 사실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것들이다. 행인을 근처 상점으로 유인하려고 만들어진 촬영 스팟 앞에서 인스타그램 인증샷을 위한 포즈를 취하는 관광객들이 있고, 냉각탑 옆에 자리한 황량한 운동장에서 형광색 조끼를 걸쳐 입은 스포츠 동호인들을 찍은 사진도 있다. 지역 풍습과 제철 특산물을 기념하는 이색적 축제를 찍은 사진도 있고, 자연과의 조우를 세심하게 연출한 사진도 있다.

 

김승구의 풍경들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인물과 장소를 건축 모형처럼 잡아내는 하이앵글이다. 경로와 경계들이 복잡하게 얽힌 연결망 전체를 바라보면서 환경이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사물의 작동 원리를 드러내기 위해 우리 시선을 자꾸 바깥쪽 가장자리로 끌어당긴다. 그의 사진들 속에서 스펙터클 자체는 중심이 아니다. 오히려 부재한 경우도 있다. 광명시 벚꽃 축제를 찍은 사진에서는 작은 원형 극장으로 모여드는 군중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면이 아니라 무대 뒤편을 본다. 진행 측 천막들이 모여 있는 부분의, 가장 가까운 천막의 안이 들여다보인다. 그곳에는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지루한 듯한 모습으로 테이블에 둘러앉은 보안 요원들이 있다.

 

작가의 작품에서 우리는 여러 층위의 사회적 풍경을 본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한국적 삶’의 어떤 특질이다. 김승구 작가가 ‘사회적 역설’이라고 부르는 특성으로 한국의 급속한 경제적 성장에서 비롯된 측면이다. 장시간 노동을 하는 문화와 짧게 주어지는 휴가 덕분에 대부분의 여가 활동은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거주하는 서울과 수도권 인근에서 이루어진다. 진달래꽃이 만발한 들판을 개미 떼가 몰려다니듯 줄지어 다니는 장면은 누군가에게는 디스토피아처럼 보이겠지만 작가에게는 한국인들이 가진 낙천성의 상징이다. 모든 장소가 활기로 가득 차 있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적인 상호 작용도 관찰할 수 있다. 아버지와 아이가 캠핑장 근처 정체불명의 유적 발굴지와의 경계가 쳐진 곳 앞에서 공을 차고 있다. 양귀비 밭에서는 한 여자가 그림 같은 꽃밭을 배경으로 휠체어를 탄 나이 든 남성을 밀고 있다. 거주민들의 열망을 반영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도시들은 지상 최대의 쇼를 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추억도 확실히 남을 것이다. 김승구 특유의 부감 샷이 더해지며 평범한 일상에 특별한 느낌을 더한다.

 

그의 연작에서 자연 세계는 곤혹스러운 존재에 가깝다. 김승구의 풍경 사진 속 장면들은 자연을 지시한다. 잃어버려 사라진 것들을 스펙터클로 재현함으로써 일종의 안도감을 불러일으킨다. 사진들 속 자연은 전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오로지 소비되기 위해 조성되었다. 이런 점에서는 1967년 출간된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 속 메시지가 한층 큰 울림을 가진다. “현대적 생산 조건이 지배적인 사회 속 인간의 삶은 스펙터클의 압도적 축적으로 표현된다. 신체를 써서 직접 살아야 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 ‘표상’들로 환원되어 버린다”라고 기 드보르는 썼다.

 

대한민국은 사회 구성이 조직적이고 시민들 간 태도가 전반적으로 친근하지만, 균형이 깨질 것 같은 묘한 조짐 또한 느껴진다. 앞으로 몇 년 후의 우리가 김승구의 <베러 데이즈(Better Days)>를 다시 본다면 어떻게 느낄까? 그 ‘깨질 듯한 묘한 조짐’은 현실화되어 있을까 아니면, 그저 과거 혹은 미래의 먼 징후로만 남아있는 채일까? 후기 자본주의의 넘치는 생산성을 토대로 한 삶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렇다면 일종의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까? 어쩌면, L.S. 로리가 맨체스터에서 제조업 종말의 징후를 포착함으로써 탈산업 시대를 예견했던 것처럼, 김승구 작가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등장으로 사람 간의 접촉이 사라져 갈, 임박한 지각 변동을 예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Simon Bain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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