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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섬, 또는 말소된 자연

문명이 이룩해놓은 것을 자연이 제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짧을 수 있다.

 

- 앨런 와이즈먼, <인간 없는 세상>

밤섬은 한강 하류에 있는 작은 섬이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에는 밤섬과 그 옆에 있는 여의도가 하나의 큰 하중도(河中道) 위에 있는 두 개의 지점으로 표시되어 있다. 장마철이면 얕은 강으로 변하는 모래톱이 두 섬을 이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섬들은 한강 수위가 높을 때는 떨어져 있다가 낮아지면 하나로 합쳐졌다.

 

여의도가 개발되면서 이런 풍경은 더이상 볼 수 없게 된다. 1968년 서울시는 밤섬을 폭파하고 거기서 나온 석재를 이용하여 여의도 둘레에 제방을 쌓기로 결정한다. 당시 밤섬에는 60여 가구가 배를 만들거나 누에를 치면서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들은 자기들의 고향이 폭음과 함께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강 한가운데 우뚝 솟아나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던 밤섬은 초라한 잔해만 남기고 사라진다. 한편 백사장에 지나지 않았던 여의도는 국회의사당과 증권가가 있는 번화한 도심으로 발전한다. 

사람들은 한동안 밤섬의 존재를 잊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섬의 잔해가 점점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강물이 실어온 퇴적물로 조금씩 몸을 불리면서 밤섬은 어느덧 처음보다 여섯 배나 넓어졌다. 인간의 발길이 끊긴 사이, 섬은 온갖 식물로 빽빽하게 뒤덮였고 다양한 야생동물들, 특히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밤섬은 대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철새 도래지이다. 해마다 수천 마리의 새가 시베리아에서 날아와 이곳에서 겨울을 난다. 밤섬을 난개발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서울시는 1999년 이곳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했다.

 

김승구의 <밤섬>은 이 비밀스러운 섬의 풍경을 독특한 시선으로 조명한다. “철새들의 낙원”이라는 수식어에서 연상되는, 풍요로운 자연의 이미지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그의 작품 앞에서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동판화의 선처럼 섬세한 버드나무 가지들과 허공에 초록색 누더기를 걸쳐놓은 것 같은 가시박 덩굴. 시야 가득히 밀려오는 이 낯선 ‘자연’은 교외의 다듬어진 자연과도,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원시의 자연과도 닮지 않았다. 비바람에 씻긴 콘크리트 교각이 더욱 이 장소를 버려진 곳처럼 보이게 한다. 이곳에는 폐허의 고요함과 평화가 있다. 인간이 사라진 세상의, 마침내 되찾은 평온함이.

 

<인간 없는 세상>에서 앨런 와이즈먼은 인류가 사라진 뒤 뉴욕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한다. 인간이 사라진다면 뉴욕의 지하철은 이틀이 못가 침수되고 천장이 무너질 것이다(지하 공간이 유지되는 것은 끊임없이 물을 퍼내기 때문이다). 도로에 스며든 물이 겨울 동안 얼었다 녹으면 콘크리트에 균열이 생길 것이고, 그러면 그 자리에 갈퀴덩굴 같은 풀이 뿌리를 내려서 틈을 더욱 벌려놓을 것이다. “지금은 이런 상태가 되기 전에 도시 유지 담당자가 나타나 풀을 죽이고 틈을 메워버린다. 하지만 인간 이후의 세상에서는 뉴욕의 길바닥에 난 틈을 메워줄 사람이 없다.” 20년이 지나면 피뢰침이 삭아 떨어진 건물들이 벼락을 맞아 불타기 시작하고, 그을리고 깨진 창문으로 눈비가 들이칠 것이다. 이끼가 가득한 벽을 담쟁이덩굴이 타고 오르고, 뼈대만 남은 지붕에는 송골매가 둥지를 튼다… 500년이 지나면 교외의 주택 단지는 숲으로 돌아가고, 1000년이 지나면 인간이 만든 구조물 대부분이 무너진다.

이런 묘사는 어째서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일까? 인간이 사라지면 자연이 모든 것을 천천히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라고(또 다른 인류가 역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기대하지는 말자. 인간이 사라지면 냉각수를 공급받지 못한 원자로들이 폭발할 것이고, 거기서 나온 방사능이 자연적인 수준으로 줄어들기까지 수십만 년이 걸릴 것이다. 인간이 남긴 플라스틱이 분해되는 데도 역시 수십만 년이 걸린다.

인간 없는 세상을 상상할 때의 해방감은 오히려 다른 데서 온다. 인간이 없다면 자연은 아무 의미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의 훼손이나 회복에 대해 말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자연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다. 인간적인 세계의 바깥에, 일체의 판단을 거부하면서.

 

김승구의 <밤섬>은 이 ‘의미의 바깥에 있는 자연’을 포착한다. 혹은 그것의 자리를 표시한다. 밤섬은 우리가 ‘자연’의 이름으로 재현하고 모방하는 관념이 아니라, 그 관념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 말소된 무엇이다. 우리의 무의식 속을 표류하며 증식하는… 추방되었지만 자꾸 되돌아오는….

어지럽게 자라난 밤섬의 버드나무는 가지런히 심어진 여의도의 벚나무와 대조를 이룬다. 후자는 전자를 대신하고, 전자의 존재를 지우면서 인공/자연의 대립 안에서 ‘자연’의 자리를 차지한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바람을 쐬려고 바깥에 나올 때 기대하는 것은 이 길든 자연이다.

 

재현된 가짜 자연과 말소된 진짜 자연이라는 주제는 <진경산수>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김승구는 아파트 단지의 조경을 위해 제작된 다양한 산수(山水) 모형--‘금강산’, ‘설악산’ 등의 이름이 붙어 있고, 미니 폭포가 흐르는—을 보여준다. ‘진경산수’라는 제목은 꽤나 풍자적이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진짜 경치를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화가들은 이 단어로써 중국풍의 이상화된 자연이 아닌, 자기들의 눈앞에 있는 자연을 그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진경산수>가 보여주는 구조물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관념으로서의 산수를 재현한 것이다. 김승구는 이 제목을 조경업체의 상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는 조경업체가 정성스럽게 재현한 ‘진경산수’를 진짜 풍경처럼 전시한다. 관람객들이 그 앞을 산책할 수 있게 말이다.

이 작품의 의도는 ‘키치’에 대한 비판일까?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진경산수’ 모형들을 보면 키치를 정의하는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진정성 없는, 가짜의, 조잡한, 상업적인, 독창성이 결여된…. 하지만 이 키치들을 전시하는 작가의 태도에는 어떤 진지함이 있다. 그는 그런 구조물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비웃기보다는 그들의 욕망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자연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욕망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경치 좋은 곳에 집을 짓고 큰 창을 내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꽃으로 집을 장식하거나. 축소된 금강산 모형으로 아파트 단지를 꾸미는 사람들의 욕망은 이들의 욕망과 질적으로 다른 것일까?

키치를 비판하기란 쉬운 일이다. 키치는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키치는 초고속으로 성장한 동아시아의 대도시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다. <Better Days>에서 음식점의 한쪽 벽면을 장식한, 오래된 성(城)의 사진처럼.

<Better Days>는 자연과 인공의 기이한 균형을 보여주는 또 다른 연작이다. 이 작품은 고된 노동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권태와 욕망 사이를 오가며” 휴가를 보내는 장소들을 다룬다. 테마파크라고 불리는, ‘자연 속에 자리 잡은’ 거대한 놀이시설들. 이 인공물들은 사진사가 수레에 싣고 다니는 풍경화--사람들이 그 앞에서 ‘즐거움’을 연출하고 ‘추억’을 남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의 발전된 형태이고(사진찍기는 사람들이 유원지에서 가장 많이 하는 활동 중 하나다), 그런 면에서 <진경산수>의 모형 정원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문화를 비판하는 것은 여기서도 작가의 관심사가 아니다. <Better Days>에는 문을 닫았거나 공사 중인 유원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자주 나온다. 마치 사람들이 테마파크에 가는 이유는 즐거움이라는 환상에 기만당해서가 아님을 강조하려는 듯이. 그들은 자기들이 ‘세트’ 속에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다만 그 세트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이다.

 

무대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로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알베르 카뮈, <시지프의 신화>)

 

<밤섬>은 이 모든 노력의 대척점에 있다. 밤섬은 사르트르의 마로니에처럼 평온한 일상을 뚫고 나온다. 밤섬은 풍경 속의 한 점, 균열을 일으키며 커져가는 점이다. 무대장치에 난 구멍이자, 우리를 지켜보는 거대한 눈이다. 우리가 섬을 보고 있지 않을 때도 섬은 우리를 본다.

여기에 <밤섬>이 주는 독특한 위안이 있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밤섬>은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일과가 끝나는 시간, 바쁜 하루의 기억이 범람하는 강물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시간에 밤섬은 해를 등지고 무심하게 빛나고 있다.

-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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